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스 크렙스 (문단 편집) ==== 마지막 모스크바 주재 독일 무관 ==== 쾨스트링과 함께 모스크바에 체류하던 크렙스는 폴란드 침공이 마무리된 후,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 영토를 분할하는 협상단을 수행했고 1939년 12월부터 7군단 참모장으로 [[프랑스 침공]]에 참전한다. 7군단은 16군 예하 부대로 당시 16군 참모장이 발터 모델 중장이었다. 프랑스 침공의 승리 후 크렙스는 1940년 10월 모스크바로 복귀하였다. [[스탈린]]은 영관급 장교인 크렙스를 대단히 총애했는데 ‘우리는 영원히 친구로 남을 걸세, 어떤 일이 있어도!’라며 크렙스에게 볼맞춤 인사를 할 정도였다. 1941년 초에 모스크바 기차역에서 일본 외무 장관을 환송하는 자리에서도 스탈린은 크렙스에게 '나는 확신하네!'라며 변치 않는 신뢰를 표현했다. [[파일:Bundesarchiv_Bild_146-1993-114-28A,_Hans_Krebs,_Ernst_August_Köstring.jpg|width=600]] ||주러시아 독일 대사관에서의 한스 크렙스(左)와 에른스트 쾨스트링|| 쾨스트링의 병가로 크렙스가 모스크바 주재 독일 무관이던 1941년 6월 22일, 불가침 조약이 파기되고 바르바로사 작전과 함께 독소전쟁이 시작된다. 쾨스트링과 크렙스는 외교 면책 특권으로 독일에 귀국할 수 있었고, 쾨스트링은 건강상의 이유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. 크렙스는 OKH에서 근무 중 1942년 1월, 사령관과 참모장이 교체된 9군의 참모장으로 임명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